메를로 퐁티로 읽는 공각기동대
"몸은 우리가 세계를 파악하는 일반적 매개체이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남긴 이 말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다. 데카르트 이후 서구 철학은 '생각하는 정신'과 '물질적인 몸'을 다른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이런 생각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50년 후, 일본의 만화가 시로 마사무네는 《공각기동대》라는 작품을 통해 같은 질문을 던졌다다.
주인공 쿠사나기 소령은 뇌를 제외한 거의 모든 몸이 기계로 바뀐 존재이다. 과연 이런 미래가 가능할까? 그리고 정말 가능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인간'일까?
우리는 몸으로 생각한다
메를로퐁티의 핵심 아이디어는 간단하다. '우리는 머리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생각한다'는 것.
예를 들면 자전거를 타는 방법은 책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 익힌다. 넘어지고, 균형을 잡고, 페달을 밟으면서 몸이 동작을 기억한다. 이런 '몸의 지혜'는 머리로 하는 계산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다.
문손잡이를 돌릴 때도 마찬가지다. "어디에 손을 올려야지, 얼마나 힘을 줘야지"라고 생각하지 않고, 몸이 알아서 한다. 메를로퐁티는 이를 몸-스키마라고 불렀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몸이 끊임없이 세상과의 관계를 조직한다는 뜻이다.
몸은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
더 흥미로운 건 메를로퐁티의 살(flesh) 개념이다. 우리가 세상을 만질 때, 세상도 우리를 만진다는 아이디어다. 나무 껍질의 거칠음을 느낄 때, 나무도 우리 손의 부드러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와 세상이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메를로퐁티의 통찰이다. 주체와 객체, 내가 느끼는 것과 느껴지는 것 사이에는 절대적인 경계가 없다는 것.
쿠사나기의 딜레마
쿠사나기 소령의 몸은 거의 전부가 기계이다. 메들로퐁티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완전한 모순처럼 보인다. 몸 없이 어떻게 세상을 느낄 수 있을까?
쿠사나기는 끊임없이 자신의 '몸'에 대해 고민한다. 특히 수영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물의 부력과 저항을 느끼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비록 그 몸이 인공적이지만, 여전히 그녀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을 결정한다. 총을 쏘고, 건물을 뛰어오르고, 동료들과 접촉할 때의 모든 경험이 그 기계 몸을 통해 이루어진다.
디지털 세상에서의 '접촉'
더욱 흥미로운 건 쿠사나기가 네트워크에 '다이빙'할 때이다. 작품에서는 이를 마치 새로운 형태의 몸 경험처럼 그린다다. 데이터의 흐름을 '느끼고', 정보의 구조를 '만지며', 다른 의식들과 '접촉'한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게 정말 몸의 경험일까? 메를로퐁티가 말한 체화된 경험은 물리적 공간과 시간에 기반한다. 디지털 공간에서의 경험이 진짜 '몸으로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비유적 표현인지 확실하지 않다.
시각장애인의 지팡이가 몸의 연장이 되는 것처럼, 쿠사나기의 기계 몸도 확장된 몸일 수 있다. 하지만 네트워크에서의 경험까지 '몸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건 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 같다.
기술이 발달해도 변하지 않는 것
《공각기동대》에서 등장인물들은 전뇌화를 통해 직접 의식을 공유할 수 있는데도, 가장 깊은 유대감은 여전히 물리적 접촉으로 이루어진다.
쿠사나기가 동료의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바토가 그녀를 껴안는 장면들. 이런 순간들은 단순한 감정적 연출이 아니다. 의식 공유를 넘어선, 더 근본적인 확인의 순간들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몸을 통한 직접적 접촉은 대체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화상통화 기술이 발달해도 직접 만나서 악수하고 포옹하는 것과는 다르다. 코로나로 비대면이 일상화되었을 때, 사람들은 직접적인 접촉을 그리워했듯이.
VR 기술이 정교해져도 마찬가지다. 가상현실에서의 '생생한 현실감'조차 결국 우리 몸의 감각을 조작해서 만드는 것이니까. 진짜 몸이 없다면 그런 감각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형술사와의 합체: 진화인가 소멸인가?
작품의 클라이맥스에서 쿠사나기는 인형술사와 합체를 선택한다. "나는 더 이상 과거의 나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나'라는 말을 쓴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한 가지 해석은 이것이 새로운 형태의 존재로의 진화라는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살의 존재론 관점에서 보면, 빨란색 물감과 파란색 물감이 만나면 새로운 보라색을 만들듯이, 개체들은 서로 섞이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쿠사나기의 선택도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개체, 정보 생명체로 진화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보면, 정체성의 완전한 해체일 수도 있다..
메타버스와 AI의 시대
현실 사회는 《공각기동대》의 미래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고 있다. 메타버스에서 아바타로 살고,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이 발달하고, 텔레프레즌스(예로 화상회의)로 원격 작업을 한다.
하지만 메를로퐁티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무리 정교한 가상 경험도 물리적 몸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한다는 것. 그래서 VR 기기들도 점점 더 정교한 촉각 피드백을 제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메를로퐁티와 《공각기동대》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기술이 계속 발전하면서 더 많은 가능성과 딜레마를 마주하게 될 테니까.
확실한 건 하나이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몸을 통한 경험은 여전히 소중할 것이라는 점이다. 쿠사나기가 수영을 하고, 동료와 어깨를 맞대는 순간들이 여전히 의미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