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러시아 발레와 피겨 스케이팅

엘노스 2025. 6. 4. 15:24

러시아 내에서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스타일은 뚜렷하게 구별된다.

볼쇼이와 마린스키

모스크바는 러시아 혁명 이후 권력의 중심지로 급부상하며 큰 변화를 겪었다. 혁명 직후 발레는 황실 문화의 잔재로 여겨져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의 보호 아래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예술로 재편되며 살아남았다.

이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무용수와 교사들이 대거 모스크바로 이동하면서 볼쇼이 극장이 소련 발레의 중심지가 되었다.

볼쇼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이 주를 이뤘고, 여성적인 우아함보다는 남성적인 웅장함과 박력 있는 동작이 두드러진다.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30여 년간 예술감독을 맡는 동안, 볼쇼이는 선 굵고 역동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남성 무용수의 비중이 크고, 여자 무용수에게도 고난도 테크닉이 요구된다. 리프트는 곡예에 가까울 만큼 대담하며, 단원 개개인의 뛰어난 기량 또한 인상적이다. '스파르타쿠스' 같은 작품에서 압도적인 에너지와 파워풀한 군무는 볼쇼이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반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황실의 보호 아래 발달한 귀족적 전통의 도시다. 마린스키 발레단이 그 유산을 이어받고 있다.

마린스키 발레는 우아하고 기품 있는 표현력을 중시한다. 고난도 기교는 표현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강하다. 섬세한 팔 동작과 유려한 몸의 선을 통해 감정을 전달하는 데 주력한다.

 

'백조의 호수'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 같은 클래식 발레 작품에서 마린스키의 섬세함과 서정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러시아 페어 스케이팅의 황금기

이러한 예술적 성향 차이는 피겨 스케이팅에서도 드러난다. 특히 러시아 페어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CSKA(중앙 육군 스포츠 클럽)'는 냉전 시기 "붉은 군대"로 불릴 정도로 혹독한 훈련으로 유명했고, 구 소련의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을 대표했다.

이곳은 수십 년간 세계 피겨 페어 부문을 지배한 산실이었다. 현재는 모스크바를 연고지로 하는 종합 스포츠 클럽으로 운영되고 있다.

- 1964년부터 2006년까지 : 12회 연속 동계 올림픽 페어 금메달
- 1965년 이후 : 세계 선수권 33회 우승

이 기록들은 구 소련이 페어 부문에서 얼마나 압도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모든 것의 시작은 데스 스파이럴 기술을 도입하며 올림픽 2연패와 세계 선수권 4연패를 이룬 류드밀라 벨루소바 & 올레그 프로토포포프 조였다.

이후 이리나 로드니나가 알렉세이 울라노프, 알렉산드르 자이체프와 파트너를 이뤄서 올림픽 3연패, 세계선수권 10회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우며 구 소련의 페어 지배를 공고히 했다.

러시아 피겨의 양대 스타일

모스크바 스타일은 스피드와 파워를 중심으로 한다. 벨루소바-프로토포포프, 로드니나-울라노프/자이체프로 이어지는 조들은 기술적으로 경쟁자를 압도했다.

이들은 높은 난이도의 점프, 강력한 스로우, 그리고 빠른 스피드를 바탕으로 경기를 장악하는 데 주력했다. 볼쇼이 발레의 웅장함처럼, 압도적인 기술력과 다이내믹함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반면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엘레나 발로바 & 올레그 바실리예프 조는 러시아 페어 역사에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이들은 기술 중심의 흐름 속에서 발레적 우아함과 예술적 연기를 도입하며, 페어 스케이팅의 예술성을 보여준 선구자였다. 세련된 음악 편집과 극적인 표현, 남녀가 함께 링크를 가로지르는 페어 스파이럴 같은 새로운 시도가 인상적이었다.

92년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나탈리아 미슈쿠텐옥 & 아르투르 드미트리예프(M&D) 조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전통을 이어받은 팀이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코치 타마라 모스크비나의 지도 아래 예술성과 혁신성을 겸비한 스타일로 피겨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M&D는 단순한 기술 과시보다는 감정의 극적인 전달을 중요시했다. 곡의 고조에 따라 움직임의 강약을 정교하게 배치했고 음악에 맞춰 표정 연기와 몸짓으로 프로그램을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하지만, 양대 도시의 스타일 장점을 모두 갖춘 팀이 등장한다. 바로 전설적인 페어, G&G(예카테리나 고르디예바/세르게이 그린코프)

 


이들은 초기에는 '쉐도우 스케이팅', '미러 스케이팅'으로 불릴 만큼 완벽한 싱크로율과 기술적 완성도가 탁월한 팀이었다. 이후 마리나 주에바와의 협업을 통해 예술적 감수성까지 더해지면서 페어 스케이팅의 정점을 완성했다.

G&G의 프리스케이팅 '월광 소나타'는 모스크바의 기술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섬세한 예술성이 조화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들의 스케이팅은 파워풀한 리프트와 스로우에도 불구하고, 매끄러운 트랜지션과 깊이 있는 표현력으로 발레와 같은 우아함을 보여준다.

G&G와 M&D가 맞붙었던 92년 동계올림픽은 현재까지도 페어 스케이팅 역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명승부로 회자되고 있다.

 

https://youtu.be/wkIK-JTI7Ls?si=I-E1ADpvmMp4WcKQ

 

 

https://youtu.be/bGlG3Hus-KQ?si=GrTKv-bDs3D35I1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