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 25일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한국형 스릴러의 기점이자, 장르적 실험의 전환점으로 자주 언급된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기반으로 한 수사극이지만, 이 영화는 단순한 범죄 장르물이라기보다는 그 틀을 해체하고, 장르적 기대 자체를 뒤흔든다. 특히 이 영화가 할리우드 수사극과 가장 다르게 느껴지는 지점은, '질서의 회복'이라는 전통적인 구조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점이다.
할리우드 수사극의 전통적 구조
할리우드의 수사극은 오랫동안 특정한 규범을 유지해왔다. 대표적으로 <세븐>(1995), <조디악>(2007), <CSI: Crime Scene Investigation>(2000~2015) 시리즈 등에서 나타나는 수사극의 문법은 다음과 같다. 과학적 기법과 이성적 추리가 중심이 되며, 수사관은 집요하게 단서를 추적하고, 대부분의 경우 범죄는 해결되거나 최소한의 윤리적 정리 선에서 마무리된다. 현실 속 제도와 권력 기관, 즉 경찰이나 FBI 같은 수사 시스템은 일정 수준의 신뢰를 전제하며 작동한다. 설령 진범을 끝내 잡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은 정서적으로 납득 가능한 수준에서 '질서의 회복'을 암시한다.
전복된 수사극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은 이와는 반대의 흐름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은 익숙한 수사극의 틀을 따른다. 시골 마을에서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무능한 지방 형사와 서울에서 내려온 이성적인 형사가 공조 수사를 시작한다. 이 과정은 겉으로 보면 할리우드식 콤비 수사물과 비슷한 구조다. 그러나 수사는 이내 무력하게 공전하고, 과학 수사는 한 번도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다. 지문은 일치하지 않고, DNA는 무의미하며, 목격자 진술은 왜곡되거나 혼란스럽다.
이러한 무력감은 단지 수사 기법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범죄는 개인적 동기가 아닌 배경 없는 침묵 속에서 발생하고, 수사관들은 사건을 좇는 과정에서 점점 감정적으로 무너진다. 이성적이었던 형사는 끝내 총을 겨누며 좌절하고, 관객 역시 어떤 카타르시스도 얻지 못한 채 공허함 속에 놓이게 된다. 이 지점에서 <살인의 추억>은 미국 수사극과 명확하게 갈라선다.
<조디악>과의 비교 분석
흥미롭게도, <조디악>은 <살인의 추억>과 유사한 테마를 다룬다. 실화를 기반으로, 수십 년간 범인을 추적하다 끝내 정체를 확정하지 못한 서사라는 점에서 표면적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두 영화의 정조는 뚜렷하게 다르다. 조디악에서 수사관과 기자들은 좌절 속에서도 끈질기게 진실을 좇고, 정황증거와 인물의 심리적 탐색을 통해 끝내 하나의 해석에 도달한다. 수사는 미완이라도 그 과정을 통해 '가까워졌음'을 관객에게 설득한다. 제도와 언론, 시민의 집념이 현실적 한계를 뚫고 나가는 이야기다.
반면 살인의 추억은 수사와 인물 모두가 침묵과 포기로 향한다. 시스템은 처음부터 신뢰할 수 없었고, 등장인물들은 수사 윤리와 감정적 책임 사이에서 점점 해체된다. 형사들의 신념은 흔들리고, 마을은 더 이상 공동체로 기능하지 않으며, 진범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송강호가 말없이 바라보는 카메라는, 진실의 부재 자체를 감정적으로 증폭시킨다.
사회적 전제의 차이
이러한 차이는 단지 연출 방식의 차원이 아니라, 각 사회가 수사극이라는 장르에 부여하는 전제 자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할리우드 수사극은 개인의 능력이나 제도의 정당성이 무너질 수는 있어도, 그 시스템 자체는 기본적으로 복원 가능한 것으로 묘사된다. 반면 1980년대 한국이라는 배경은, 제도 자체가 비합리적이고 무력하다는 현실을 전제한다. <살인의 추억>은 그 구조 안에서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정의의 부재를 견디는 감정의 형식을 택한다.
현실과 영화의 역설적 관계
<살인의 추억>의 기반이 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2003년 당시에는 미제 사건이었다. 그러나 2019년 7월, 경찰은 당시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춘재의 DNA가 1986~1991년 사이 발생한 피해자 10명의 유류 증거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이춘재는 같은 해 9월 자필 진술과 경찰 조사에서 총 14건의 살인과 30여 건의 성범죄를 자백했다. 2019년 12월 경찰은 그를 피의자로 특정하고 사건 명칭을 '화성 연쇄살인사건'에서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으로 공식 변경했다.
이춘재는 범행 당시 화성의 전자부품 제조 공장에서 일했고, 군 전역 직후 범행을 시작했다. 이처럼 영화 속 가해자의 특성과 실제 인물 간 유사성은 결과적으로 영화가 다룬 현실의 불가해성을 더 극적으로 부각시켰다.
한국형 스릴러의 탄생
<살인의 추억>은 할리우드 수사극과 같은 장르적 언어를 빌려오되, 한국 사회의 조건 속에서 해체하며 다른 방향으로 진화시켰다. 525만 5,376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고, 이 지점에서 '한국형 스릴러'라는 별개의 장르적 전통이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 배우가 세계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해외 평단과 영화학계에서는 한국 장르 영화의 전형적 사례로 주목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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